


직업상 또 성격상 속상하고 아픈 이야기를 잘하지 못하는 저는 카카오톡 플러스친구를 통해 전해지는 속마음버스를 마음으로 백 번도 더 타고 내렸습니다. 그러다가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하다’를 알게 되었고, 일정을 비워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낯선 곳으로의 여행. ‘어떤 사람들이 올까? 무엇을 할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날 위해 6주 동안 매일 같은 시간을 선물한다는 것. 그리고 나를 드러내야 한다면 실오라기 하나도 남기지 말고 다 비워야겠다는 굳은 결심. 두 가지 사실만으로 충분히 설레었고, 행복했습니다.
“우리 딸 바쁠까 봐 전화도 못 해. 그래도 밥은 잘 챙겨 먹어. 알았지?”
“언제 도착해? 어디야? 엘리베이터 탔어?”
갓 지은 밥이 조금이라도 식을까 봐 엄마는 제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시간을 맞추시느라 전화를 걸고, 걸고, 또 거시며 저의 위치를 확인하십니다.
“배가 든든해야 걱정도 안 생겨.”
“가만히 앉아 있어. 엄마가 갖다 줄게. 어서 많이 먹어.”
나이 마흔을 넘어 엄마의 밥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가고 있는데, 정성스럽게 차려진 밥상과 귀하게 대접해주시는 치유활동가님들….
“자리에 앉아 계세요. 저희가 가져다 드릴게요. 부족하면 말씀하시고요.”
시작도 전에 마음은 이미 엄마 앞에서 마냥 응석을 부리는 어린아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첫째 날. 내 인생에서 가장 추웠던 날을 꺼내라고 합니다. 처음으로 내 삶의 필름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들여다보았습니다. 왜 나만 이렇게 추워야 하냐고, 내가 뭘 그렇게 잘 못 했냐고. 끝도 없는 원망이 나를 짓눌렀던 때가 있었습니다. 갑작스런 동생의 죽음, 조카의 시한부 판정, 그리고 입만 열면 폭언을 쏟아내는 남편과의 별거.
아무것도 아니라고,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너 때문이 아니라고, 너의 선택을 믿는다고!
제 마음은 하루도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미친 듯이 일을 했고, 저의 선택으로 아빠를 잃은 아이들을 위해 온 힘과 마음을 쏟았습니다. 동생을 보내고 12년, 남편을 떠나 독립한 7년 동안 차츰 중심을 잡았습니다. 아이들도 건강하고 밝게 잘 자랐고, 쪼그라들었던 제 마음도 조금씩 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알았습니다. 내 마음은 괜찮지 않았다는 것을. 괜찮은 척하느라 너무 많이 지쳤다는 것을. 두 아이들을 돌보느라, 무거운 짐을 지고 계시는 부모님을 챙기느라, 정작 저는 누구의 돌봄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요. 우는 사람들들 달래주고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느라 저에게는 너무나 무심했다는 것을….
가만히 저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던 조원들, 그리고 프로그램이 끝나면 저를 꼬옥 안아주셨던 리더치유활동가님 덕분에 둘째 주부터 새로운 저만의 공간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누구에게 보일 필요도 없고, 누가 볼까 두려울 필요도 없는 따뜻하고 튼튼한 공간을 그렇게 6주간 만들어 갔습니다.
그곳에 모인 우리는 다 아프고, 힘들었습니다. 아주 다른 색깔인 것 같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모두 비슷한 색깔의 아픔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욱 함께, 오래오래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습니다.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따뜻한 밥상이 필요합니다. 6주간의 아주 특별한 여행으로 초대해주셔서 다시 한 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수고해주신 치유활동가님들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글 :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하다’ 서대문구 11기 참여자
직업상 또 성격상 속상하고 아픈 이야기를 잘하지 못하는 저는 카카오톡 플러스친구를 통해 전해지는 속마음버스를 마음으로 백 번도 더 타고 내렸습니다. 그러다가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하다’를 알게 되었고, 일정을 비워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낯선 곳으로의 여행. ‘어떤 사람들이 올까? 무엇을 할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날 위해 6주 동안 매일 같은 시간을 선물한다는 것. 그리고 나를 드러내야 한다면 실오라기 하나도 남기지 말고 다 비워야겠다는 굳은 결심. 두 가지 사실만으로 충분히 설레었고, 행복했습니다.
“우리 딸 바쁠까 봐 전화도 못 해. 그래도 밥은 잘 챙겨 먹어. 알았지?”
“언제 도착해? 어디야? 엘리베이터 탔어?”
갓 지은 밥이 조금이라도 식을까 봐 엄마는 제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시간을 맞추시느라 전화를 걸고, 걸고, 또 거시며 저의 위치를 확인하십니다.
“배가 든든해야 걱정도 안 생겨.”
“가만히 앉아 있어. 엄마가 갖다 줄게. 어서 많이 먹어.”
나이 마흔을 넘어 엄마의 밥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가고 있는데, 정성스럽게 차려진 밥상과 귀하게 대접해주시는 치유활동가님들….
“자리에 앉아 계세요. 저희가 가져다 드릴게요. 부족하면 말씀하시고요.”
시작도 전에 마음은 이미 엄마 앞에서 마냥 응석을 부리는 어린아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첫째 날. 내 인생에서 가장 추웠던 날을 꺼내라고 합니다. 처음으로 내 삶의 필름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들여다보았습니다. 왜 나만 이렇게 추워야 하냐고, 내가 뭘 그렇게 잘 못 했냐고. 끝도 없는 원망이 나를 짓눌렀던 때가 있었습니다. 갑작스런 동생의 죽음, 조카의 시한부 판정, 그리고 입만 열면 폭언을 쏟아내는 남편과의 별거.
아무것도 아니라고,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너 때문이 아니라고, 너의 선택을 믿는다고!
제 마음은 하루도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미친 듯이 일을 했고, 저의 선택으로 아빠를 잃은 아이들을 위해 온 힘과 마음을 쏟았습니다. 동생을 보내고 12년, 남편을 떠나 독립한 7년 동안 차츰 중심을 잡았습니다. 아이들도 건강하고 밝게 잘 자랐고, 쪼그라들었던 제 마음도 조금씩 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알았습니다. 내 마음은 괜찮지 않았다는 것을. 괜찮은 척하느라 너무 많이 지쳤다는 것을. 두 아이들을 돌보느라, 무거운 짐을 지고 계시는 부모님을 챙기느라, 정작 저는 누구의 돌봄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요. 우는 사람들들 달래주고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느라 저에게는 너무나 무심했다는 것을….
가만히 저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던 조원들, 그리고 프로그램이 끝나면 저를 꼬옥 안아주셨던 리더치유활동가님 덕분에 둘째 주부터 새로운 저만의 공간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누구에게 보일 필요도 없고, 누가 볼까 두려울 필요도 없는 따뜻하고 튼튼한 공간을 그렇게 6주간 만들어 갔습니다.
그곳에 모인 우리는 다 아프고, 힘들었습니다. 아주 다른 색깔인 것 같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모두 비슷한 색깔의 아픔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욱 함께, 오래오래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습니다.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따뜻한 밥상이 필요합니다. 6주간의 아주 특별한 여행으로 초대해주셔서 다시 한 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수고해주신 치유활동가님들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글 :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하다’ 서대문구 11기 참여자